Q. 롤드페인트는 어떤 공간인가요? 더블랭크 구독자분들께 소개 부탁드려요.
롤드페인트는 2019년 대구 봉산동에서 저의 첫 작업실 겸 마스킹 테이프 전문숍으로 준비한 공간이에요. 올해 5월에 대구에서 서울 합정으로 이사를 오게 됐죠. 이곳에서는 제가 작업의 주 재료로 사용하는 마스킹 테이프를 여러분에게 소개하면서 판매하고 있고, 마스킹 테이프라는 도구와 친해지실 수 있도록 다양한 마스킹 테이프 아트의 작업 방식을 공간에서 함께 나누고 있어요.
Q. 사실 좀 생소하기는 해요. 마스킹 테이프는 다이어리 꾸미기에 쓰는 문구류 정도로 알고 있었거든요. ‘마스킹 테이프 아트’라는 것이 뭐랄까, 장르적으로 확립이 되어 있는 세계인가요? 작업을 하신지는 얼마나 되셨어요?
저도 사실 따져보지 않았었는데, 올해로 마스킹 테이프 아트 작업을 시작한지 벌써 10년이 됐더라고요. 10년 전에 제가 시작할 때만 해도 국내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정도였어요. ‘마스킹 테이프 아트’라는 표현 자체도 사용하지 않았었고요. 해외에도 많지는 않았고, 일본이나 호주 등에서 몇몇 작가들을 찾을 수 있었는데 그분들이 ‘마스킹 테이프 아트’라는 해시태그를 쓰고 계시더라고요. 그때부터 저도 ‘마스킹 테이프 아트’라는 표현을 쓰게 됐고, 마스킹 테이프 일러스트, 혹은 마스킹 테이프 드로잉과 같이 활용도 하기 시작했죠. 이 장르 자체가 저와 함께 같이 성장해 온 것 같아요. 제 작업 방식이나 소재 같은 것들에 대한 질문들이 생기고, 그것들에 대해 설명하고 안내하면서 아직 대중적인 사랑과 관심을 받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국내에서 이 장르가 자리 잡는 데에 조금이나마 기여했던 것 같아요. 2018년에는 마스킹 테이프 아트를 주제로 책도 출간했고요.
Q. 원래 롤드페인트를 운영하기 전에는 어떤 일을 하셨나요?
이 얘기를 하기가 괜히 쑥스럽지만 전문 댄서였어요. 그때는 10년 뒤 제가 마스킹 테이프를 붙들고 살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죠. 평생, 할머니가 되어서도 춤을 출 줄 알았으니까요. 학창시절엔 선수로 도전을 생각할 만큼 수영에 푹 빠져 있기도 했고요. 취미로는 자전거에 미쳐서 진짜 열심히 자전거를 탔을 때도 있었어요. 댄서들이 지금처럼 환영받고, 하나의 직업으로 인식되기 전 세대였기 때문에 환경이 무척 열악했지만, 그때 경험했던 것들이 저에게 정말 소중한 자산이 된 것 같아요. 전혀 안 되던 동작이 포기하지 않고 계속 연습하다 보면 결국 된다든지 하는 경험들이요. 끈기나 본질에 집중하려는 마음가짐처럼 내면을 다스리는 방법에 대해서 그때 많이 배운 것 같아요.
Q. 얘기를 듣다 보니 몸을 움직여 표현하고, 바깥으로 발산해야 하는 에너지가 많은 분인 것 같아요.
맞아요. 끊임없이 몸을 움직였어요.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을 잘 견디지 못했죠. 어려서부 지병이 있어 건강에 대한 결핍이 있었는데, 거기에 후천적 질병들이 더해져서 외부 활동이 어려울 정도까지 건강이 악화됐을 땐 그 에너지를 발산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갈증이 너무 컸어요. 해소시킬 수 있는 창구가 간절했죠. 하루종일 방 안에서 시간을 보내야 하는데, 뭔가에 몰입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겠더라고요.
Q. 그 창구가 마스킹 테이프를 만나면서 열리게 된 건가요? 마스킹 테이프를 ‘돌돌 말려 있는 물감’이라고 표현하신 것을 봤어요. 참 인상적인 표현이에요. 그런데 왜 마스킹 테이프였나요? 대표님에게 ‘마스킹 테이프’는 어떤 존재인가요?
어려서부터 아토피가 무척 심했는데, 아토피는 성인이 되어서도 계속 함께했어요. 손을 집중시킬 곳이 필요해서 찾게 되었던 것이 캘리그라피였는데, 그때는 펜을 붙잡고 한참 몰입하는 시간들을 즐겼었죠. 그런데 건강의 호전되지 않고 계속해서 악화만 되니 우울감에 깊게 빠졌었던 때가 있었어요. 펜으로 감정들을 옮겨 내는데, 내면에서 현실과의 부조화를 많이 느꼈어요. 이렇게는 더 이상 건강하게 글을 써 내려갈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러다 어느 날은 ‘글씨가 아니라 그림이면’이라는 생각들이 들었어요. 그런데 저는 그림을 그리는 것에는 정말 소질이 없는 사람이거든요. 미술을 향한, 그림을 향한 로망은 항상 있었는데 재주가 없으니 마음으로만 갈망한 분야였죠. 그때 마침 굴러다니던 마스킹 테이프가 눈에 띄어 종이에 붙여 봤는데, 붙이는 것만으로도 선과 색이 만들어지는 것에 흥미로움을 느꼈어요. 그때부터 방법은 전혀 모르지만 계속 찢고 오려 붙여 그림을 만드는 방법들을 공부했어요. 마스킹 테이프는 제가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만들어 준 유일한 도구예요. 그때 만약 제 손에 펜이 잡혀 있었다면, 이런 그림들을 그려 낼 자신이 없었을 거예요. 대신 마스킹 테이프라면 붙였다, 떼었다, 몇 번을 수정하며 찢고 붙여 그림을 만들어 낼 자신은 또 있었고요. 마스킹 테이프로 그림을 그린다는 것, 아트를 한다는 게 일반적이지 않으니 정해진 답도 없고, 일반적인 회화처럼 기초적이고 필수적인 교육과정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그냥 내 마음 가는 대로 시작할 수 있다는 게 너무 좋았던 것 같아요.
게다가 내 손톱이 더이상 피부를 쫓지 않고 마스킹 테이프를 찢어 내는 촉감에만 집중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게 신기했어요. 그 어떤 약보다도 마스킹 테이프는 건강하게 마음을 지키며 견뎌낼 수 있도록 나에게 도움을 줬어요. 치유죠. 약과 같았고요. 위로, 위안, 희망. 덕분에 견뎌냈어요.
Q. 그렇게 듣고 보니 특별한 교육과정 없이도 누구나 부담 없이 시작할 수 있다는 게 굉장한 장점 같네요. 마스킹 테이프를 단순히 ‘문구’로만 생각했을 때는 보이지 않던 부분인데, 예술의 재료가 된다고 생각하니 접근이 훨씬 쉬워졌어요. 그렇다면 작가로 작업을 하시다가 이렇게 롤드페인트라는 공간을 기획하시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저는 작업 시에 단색 마스킹 테이프를 주로 사용하는 편이에요. 즐겨 사용하던 패턴은 좋은 품질의 수입 제품이었는데, 생각보다 국내에서는 오프라인 구매가 쉽지 않은 제품인 게 늘 작업을 해오면서 아쉽고 갈증을 느끼던 부분 중에 하나였어요. 그러다 그 브랜드의 마스킹 테이프를 취급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이 계기가 되었는데, 처음에는 고민도 무척 많이 되더라고요. 스토어 운영은 처음이라 ‘개인 작업과 동시에 운영이 가능할까?’ 하는 걱정도 물론 있었고요. 그런데 국내 오프라인에서 그런 환경이 만들어진다는 것을 잠깐 머릿속으로 상상해 보니, 이미 그것만으로도 벌써 엄청 설레더라고요. 심지어 그 환경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이 내가 될 수 있다는 데에 더 설레어 마음이 크게 기울었던 것 같아요. 그때 이번 기회가 아니라면 더는 이런 기회가 없을 것 같아 도전해 본 것이 롤드페인트였어요.